(남원)승천을 준비하는 용의 나라 남원은 동학의 성지

 

- 일시: 2023-10-7~9
- 날씨: 비 약간 온 후 흐림
- 몇명: 홀로

 

신라 신문왕때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남원(南原)은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남쪽의 근원입니다. 옛 사람들은 남원을 호남의 인후지지(咽喉之地)라 하였다고 합니다.이말은 남원이 바로 호남의 목구멍과 같은 땅으로, 호남 사람, 호남 지역의 흥망성쇠를 가늠할 만한 매우 중요한 요충지라는 뜻이 됩니다.

 

실제로 정유재란 시기 남원성 전투를 보면 왜군은 우키타 히데이에, 도도 다카도라 등 58,000명의 병력으로 조선군 11,000명(군민 7,000명,전라병마군 1,000명,명나라군 3,000명)을 모두 전사시키거나 살해합니다.1597년 음력 8월12일 부터 남원성이 함락된 8월15일까지 3일간이었는데 왜군 58,000명은 정규군이라면 조선군과 명나라의 정규군은 4,000명에 불과했고 7,000명은 일반 군민이었기 때문에 중과부적이었습니다.죽은 장수들은 남원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희생된 시체들은 만인의총을 세웠습니다.이후 항전은 구례에 있는 석주관 칠의사묘가 세워졌습니다. 남원 전투에서 조선군대가 참패하면서 전라도 지역은 일본군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고 곡창 지역인 전라도를 뺏기면서 조선측의 식량 문제가 생겼고 반면 일본군의 식량 문제가 해소됐습니다.

이로 인해 수도 없이 많은 남부 백성들이 유린당하고 짓밟혔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죽은 병사는 물론이고 살아 있는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 『지봉유설』 등 여러 문헌에 등장합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일본 교토에 있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입니다. “에비! 에비야!” 위험한 것이나 더러운 것 등을 아이가 만지려고 할 때 사용한 경계의 말인데, ‘귀와 코의 한자인 이비(耳鼻)’와 ‘귀와 코를 베어 가는 사람인 이비야(耳鼻爺)’에서 유래했습니다. 

남원은 용의 나라입니다.용성(龍城)은 남원부의 별호라는 기록은 『고려사』지리지 전라도 남원부조에 처음 등장합니다.이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입니다.지금도 용성(龍城)이라는 이름의 학교명이 즐비하고 현재 교룡산성이 있습니다.교룡(蛟龍)은 뿔이 없고 비늘이 있는 용을 말합니다.그래서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 호걸을 의미합니다.교룡이 뿔을 갖고 여의주를 물면 승천하는 용이 되니 이곳을 찾은 동학교주 최제우는 우연으로 남원에 간 것이 아니라 "龍"을 찾아 의도적 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아마도 제 추측으로는 주유팔로하며 보부상 같은 장사를 했었기 때문에 이미 남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역사적인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 입니다.

최제우는 1861년 6월부터 본격적인 동학 포덕 활동을 했으나 경주관아로 부터 사도난정(邪道亂正)이라는 죄명으로 지목을 받아 몸을 피하여 전라도로 몸을 피했다는 것이 그동안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우연히 만난 농어촌과 향토사학에 관심이 많은 김용근 문화유산해설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즉, 민간의 백성들이 원하는 스토리텔링이 되려면 최제우가 교룡득수(蛟龍得水)로 좋은 기회를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시작하였고 교룡산성 안의 덕밀암(德密庵)에서 비밀스럽게 용의 뿔을 갖게되고 여의주를 무는 작업인 덕(德)을 만든 곳이 바로 숨은 행적이 된 은적암(隱蹟庵)입니다. 덕밀암에서 비밀스럽게 만든 덕(德)이라는 것은 1862년 3월까지 이곳에 숨어 지내며 동학의 주요 경전인 논학문(論學文), 권학가(勸學歌), 교훈가(敎訓歌), 도수사(道修詞) 등을 지었습니다. 동학에서는 "포교" 혹은 "전도"라고 하지 않고 포덕(布德)이라고 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남원은 승천을 준비하는 용의 나라로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 고장이었습니다. 

 

 

 

▷ 답사일정(風輪) :494km

퇴수정-황산대첩비지-동편제마을-정령치 개령암지 매애불-교룡산성 선국사,은적암-무민공 황진기념관,대곡리 암각화-신계리마애여래좌상-혼불문학관-서도역

 

 

2023-10-7

 

부산에서 180km를 달려 도착하여 휴식을 취한 곳은 퇴수정 근처 매동마을 입구(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534-1)에 오후 6시 조금 지나 주차를 하였습니다.

 

차내에서 7시부터 제19회 항저우 아시안게임 한국과 대만의 야구 결승전을 시청했고 9시부터는 아시안게임 축구 한일전 결승전을 시청했습니다. 야구와 축구 모두 한국의 승리, 금메달로 결정되어 아주 기분 좋은 밤이 되었습니다. 

 

2023-10-8  

 

▷퇴수정(退修亭):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 216

 

밤 사이 약간의 비가 와서 퇴수정의 이른 아침에 사진을 찍으니 발색이 강해집니다. 퇴수정은 조선후기에 선공감 가감역관을 지내다가 증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오른 1870년(고종 7) 매천 박치기(朴致箕)가 은퇴 후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입니다. ‘퇴수정(退修亭)’. 말 그대로 [‘나이 들어 "은퇴"하여 자연 속에서 심신을 "닦는" 정자’]라는 의미입니다.

정자 옆에는 넓은 바위에 시냇물이 흐르고 뒤쪽에는 암석이 높이 솟아 있으며, 또 자연경관이 빼어나 사시사철 송림이 어우러지고, 시냇물과 암석이 멋진 풍경을 자아내며 계곡물 앞으로 바래봉을 향하고 있습니다.

 

퇴수정의 주련은 매천 박치기의 퇴수정 원운 반선대기(伴仙臺記)로 보입니다.

塵外孤臺晩托踪(진외고대만탁종) 어지러운 세상 떠나 늦게사 누대를 지어 의탁하니,

淸流九曲嶽千里(청유구곡악천리) 맑은 물은 굽이쳐 흐르고 산은 첩첩이라.

蒼松隔水冷冷韻(창송격수냉냉운) 푸른 솔 물에 드리워져 그 운치 은은하고,

白石和雲淡談容(백석화운담담용) 하얀 바위 돌과 어우러진 구름은 맑은 모습이네.

忘世許同群鶴鹿(망세허동군학녹) 세상사 잊으려 학과 사슴 벗하니,

存身傀比蟄珪龍(존신괴비칩규룡) 이 몸 숨김이 칩거한 규룡에 부끄러워라.

靜觀認是仙人過(정관인시선인과) 고요히 돌아보니 이곳은 시선이 지난 곳인지라,

林壑依然道氣濃(임학의연도기농) 산림과 구렁은 변함이 없어 의연한 기상이 짙구나.

 

(필사)

물에서 보니 퇴수정 우측에는 박치기의 후손들이 1922년 세운 관선재(觀仙齋)가 있습니다.신선세계를 보는 재실정도가 되겠는데 관선재는 사당이자 독서하는 공간으로 조상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지만, 평소에는 시서예악(詩書藝樂)을 교육하는 강학 처로 활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럭바위 사이 담(潭) 있는데 바위에 ‘야박담(夜泊潭)’ 이라고 씌여 있습니다.야박담은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에서 따온 이름입니다.이름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楓橋夜泊(풍교야박) / 장계(張繼)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가득 서리 내리고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강가 풍교와 고기잡이 불빛을 마주하고 근심어린 잠을 청하네.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한밤중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에 들려오네.


(필사)

 

정자 옆 깎아지른 바위에는 매천 박치기의 별장이란 의미의 매천별업(梅川別業) 글씨가 크게 암각되어 있습니다.

 

황산대첩비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280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로 금강 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고 했고 고려군의 최고지휘관인 이성계는 적장 아지발도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예전 사극에서도 보니 먼저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고 합니다.지휘자를 잃은 왜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고려군이 왜구를 섬멸했다고 합니다. 

 

170여년 세월이 지나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의 글,송인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고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지어 세롭게 세웠습니다.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이 부순 비는 파비각에 누워져 있습니다.기록은 있으나 아직 화살촉이나 해골 등 따로 발견된 유물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왕 송흥록 선생.국창 박초월 생가 

 

송흥록 선생(1780년경!1863년경)은 조선시대 판소리의 으뜸가는 명창으로 가왕으로 불리었습니다.계면우조 진양조 등 가조를 집성하여 판소리를 예술의 높은 경지로 승화시켰으며 춘향가의 옥중가에서 귀곡성등 큰 유파인 동편제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박초월은 (1916.9.17~1983.11.26)은 12세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송만갑 지도로 춘향가,심청가,수중가를 전수하였고.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받았습니다. 

 

조선시대 2개의 대단한 업적 중 글과 소리에서는 단연 한글과 판소리를 꼽겠죠. 판소리는 고품격 한국의 전통예술입니다.

초가집 앞으로 소나무와 국화가 더 없이 잘 어울립니다.

정령치 개령암지 마애불: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산55

현재 정령치 가는 길은 공사 중입니다.도로의 일부구간 도로폭의 3/1정도가 경사지 아래로 기울어 꺼져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막상 정령치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원래 주차료를 받는 사설이지만 공사 중이라 주차비는 받지 않았습니다. 

주차를 하고 휴게소 뒤로 난 계단길로 오르면 바로 능선이 나오고 능선의 좌측은 만복대로 가는 길이고 우측은 바래봉으로 가는 길인데 바래봉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능선에 서니 바람이 거셉니다.바래봉 방향으로 500여m 10분 정도 걸으면 개령암지 마애불 이정표가 보입니다. 의심스러우면 이곳에서 네이버 지도를 가동하여 방향을 탐색하면 됩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開嶺庵址 磨崖佛像群)의 개령암지는 개령암이라는 폐사된 암자터를 의미합니다.고려시대 절벽에 새긴 마애불상군으로 12개 불상 중에서 제가 불심이 약화되어 그런지 제 눈에는 대여섯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전(世田)’, ‘명월지불(明月智佛) 같은 뚜렷한 글씨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타원형의 얼굴 ,다소 과장된 큼직한 코,간략하게 처리된 옷주름,듬직한 체구에서 보여지는 투박하지만 힘이 있어보이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잘 보입니다.

4M 정도 되는 거대한 불상 이외 작은 불상은 마멸도가 심해서 찾아보기 더 힘듭니다.

불상 아래에 〈명월지불(明月智佛)〉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진리의 화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듯 하다고 하는데 글씨 비슷하게 보이는 부분은 찾았지만 뚜렷하게 가늠은 안됩니다.사진의 아래쪽 중간에 보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이긴 합니다.

정령치는 2004년 지리산 종주 출발지였고 바래봉은 몇번 다녀갔지만 이곳에 마애불상군이 있는줄은 몰랐습니다.정령치에서 바래봉 가는 길 주능선에서 200m 우측 안쪽에 있습니다.

교룡산성: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

교룡산은 518m이고 둘레는 3.1km로 남쪽 산천을 유력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남원의 지형에서 주산인 만행산(萬行山)의 지세가 객산(客山)인 교룡산에 비해 너무 허약한 것을 알고, 지세를 돋우고자 만복사(萬福寺)·대복사(大福寺)와 더불어 선원사(禪院寺)를 창건했다는 설이 있습니다.객산인 교룡산 하나가 절 3개를 세웠을 정도니 교룡산의 지세가 상대적으로 대단해 보입니다. 남원은 만복사,대복사,선원사,선국사가 4대천왕처럼 지키는 고장으로 보입니다.

성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밀덕봉과 복덕봉 사이 산세게 매우 가파라서 유사시 천혜의 요새가 되었다고 합니다.

 

백제 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하며 또한,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영이 크게 수축한 곳입니다.그런가하면 동학혁명 때는 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관군과 큰 접전을 벌인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합니다.


성벽에 도착하니 김개남 동학농민군 주둔지 팻말이 보입니다.물론 교룡산성 아래에 동학성지 남원 기념비도 있습니다. 남원의 농민군이 교룡산성을 공격한 기록은 1894년 8월 21일 처음으로 나옵니다.임실에서 남원까지 7만여명의 농민군들이 있었는데 남원내에서는 남원성과 교룡산성 두 곳에 농민군들이 주로 주둔하였다고 합니다.김개남의 5천병력은 10월 중순에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했다고 합니다. 

홍예문 뒤로 별장의 불망비 등이 보입니다.

세조 시절의 명신(名臣) 강희맹은 이 성에 관하여 “한줄기 굽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들어 용성 옛터 휘어드니 백운(白雲) 간이 분명코야 나라가 위태하면 오랑캐를 막을지니 이 고장이 제일이라, 호남 제일 요새로다”라고 하였습니다.

一派歸路曲曲廻 일파귀로곡곡회
龍城遺墟橫靑來 용성유허횡청래
白雲間關國家危 백윤간관국가위
胡塵萬里此最堆 호진만리차최퇴

여기서도 남원이라고 하지않고 "용성龍城"이라고 했습니다.

(필사)

 

▷선국사 善國寺


선국사까지 오르는 길이 빗물에 의해 패여 계곡의 초기 모습을 하고 있어서 우물이 99개나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조그만 우물까지 포함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국사의 본래 이름은 용천사(龍泉寺)입니다.용천(
龍泉)에서 알 수 있듯이 샘이 99개나 있었다는 내용과 "용과 물"은 경주의 "용담龍潭"과도 스토리텔링이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미르는 용(龍)을 뜻하는 순우리말이고 미리내(은하수)도 용천(龍川)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미르"는 "물"과 관련된 신비로운 생명체로 여깁니다.
교룡득수(蛟龍得水)를 보더라도 교룡은 물을 얻어야 합니다.

 

용천사가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분명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고려 말에 빈번했던 왜구의 침략과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국란이 있을 때마다 전라좌영이 위치한 남원부 산하 6개 군현에서 거두어들인 군량미를 저장하고 병력을 배치하면서 나라를 지키는 절이라 하여 선국사라고 개명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합니다.선국사 대북이 유명합니다.

 
탑을 감싼 용의 모습 같은 배롱나무가 최근 죽어간다고 하여 안타까웠습니다.

▷은적암(隱蹟庵)덕밀암(德密庵

은적암은 원래 용천사 덕밀암 자리였습니다.지금은 엄밀하게 말하면 은적암지 혹은 덕밀암지로 불러야겠네요. 터만 남은 폐암지가 되겠습니다.

선국사 뒤로 오르다 별다른 은적암의 표식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다가 우측으로 꺽어진 주변에 대나무가 많은 길에서 대나무 토막 몇개(갈필 만들 용도)를 담은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 분을 만납니다.

은적암 가는 길을 물었더니 그 길에 서서 30여분 남원의 내밀한 역사에 대하여 듣게 됩니다.저로서는 너무나 내용이 신선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서문에서 언급한 농어촌과 향토사학에 관심이 많은 김용근 문화대간 지리산문화자원연구소장님이었습니다. 대나무는 여러가지 생활도구를 만들기도 하지만 농민군의 죽창이 되기도 합니다.

직접 은적암까지 안내를 해주었습니다.은적암 입구 뿔이 없는 용(교룡)의 형상과 그 앞에 납작한 작은 제단까지 일러주었습니다.


최제우의 은적암 행은 일시적인 몸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제자들을 위한 경전 저술의 시간이 되었고 아울러 나중에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이 되는 호남 포덕의 씨앗이 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즉 남접(南接)의 시작이었습니다. 

검결(칼노래)이 만들어진 장소라는 안내판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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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때로다, 때로다, 이내 때로다, 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수만 년에 날까 말까, 장부로서 5만 년 만에 맞은 때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 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 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 있네.
만고명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만고의 명장인들 당할 자가 있겠는가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이 「칼 노래」가 결국 1864년 수운이 체포되어 대구 장대에서 좌도난정률(左道亂政律)이라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동학의 두목 최제우는 사된 방술로써 사람을 고치고 병을 낫게 한다고 사칭했으며, 주문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속였고, 칼 노래로써 국가의 정사를 모반했으니 좌도난정률에 따라 처형함이 마땅하다."

 

산신단은 국가안위와 개인의 소원성취를 빌었던 원초적 민간신앙의 성지로 정유재란 당시 무운을 빌었고 동학군의 대제단이었으며 가뭄이 심할때는 기우단으로 사용된 곳이라고 합니다.위패에 해당하는 산신지위(山神之位)글씨가 보입니다.김용근 소장님 감사합니다.

 

▷무민공 황진 기념관: 전북 남원시 대산면 하대길 23

 

김용근 소장님이 소개해 준 대곡리 암각화를 보려고 갔는데 주차할 곳을 찾다보니 황진 기념관이 보입니다. 

현 시점에서 임진왜란 1등 선무공신을 뽑는다면 당연 맨 먼저 이순신장군이지만 두번째는 정문부가 되어야 한다고 보고 세번째는 권율,김시민,황진 중 한분이 해당될 것이라는 보는데 그 황진의 기념관이 보여서 반갑게 들어가 봅니다.


입구에 무민공 황진,당촌 황위 정려 이건 기념비가 보입니다.황위는 황진의 손자입니다.
황위는 병자호란때 남원에서 창의했습니다.조부와 손자가 한 정려각에 드는 참으로 보기 드문 영예가 돋보이는 정려각입니다.

황진(1550~1593)은 1592년 임진년 왜적이 침략하여 위태로웠을때에 안덕원,이치 등의 대첩으로 호남방어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한산도 대첩,행주대첩,진주대첩이지만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웅치·이치 전투를 가장 큰 패전으로 꼽는 데에서 그 위상을 짐작케 합니다.웅치와 이치는 각각 진안과 전주 사이, 충남 금산과 완주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로, 금산을 점거한 왜군이 조선왕조의 정신적 심장이자 왜군으로부터 유린당하지 않은 유일한 전주로 가는 진격지로 활용했습니다. 만약 웅치·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막지 못했을 경우 전 국토가 유린당할 처지였던 셈입니다. 

황진 장군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곳으로 갔습니다.홍의장군 곽재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 것입니다.질 것을 알면서도 전장에 나가 군인의 본분을 다한 장군입니다.진주성 전투를 보면 호남사람들이 많이 자원하여 같이 싸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전라도 사람들입니다.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에 와서 여기서 뚫리면 전라도가 큰일을 당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도 몸소 나서 주었던 것입니다.최경회는 전라도 능주,황진은 전라도 남원,김천일은 전라도 나주,우리가 잘 아는 논개는 전라도 장수 사람입니다.전라도와 경상도의 지역감정을 운운한다면 진주로 가서 확인해보세요.

▷대곡리 암각화: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401

청동기 시대 바위에 그린 그림입니다.좌우 대칭 기하문이 새겨져 있는데 농사의 풍요와 생산의 의미를 지니는 주술행위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안내문에는 사람이나 짐승의 얼굴을 묘사한 듯하다고 하는데 워낙 추상적인 문양이라서 아무리 그렇게 볼려고 해도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울산 울주의 대곡리 암각화,남원 대곡리 암각화,안동 대곡리 암각화..눈치 채셨겠지만 공통점은 대곡리 입니다.

작은 산에서 내려와 뒤쪽으로 가보니 봉황대라고 각서되어 있습니다.작은 산이지만 바위와 나무가 뿜어내는 기운은 대단한 곳이었습니다.

다시 차량을 수배하기 위해 황진 기념관으로 오니 장수황씨 문중의 사람으로 보이는 분이 말을 걸어오고 안으로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자고 합니다.다른 일정이 있어서 사양하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황진은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일신의 무력도 훌륭한 장수였고 의리도 있던 장수였으며 승진 속도가 가히 빛의 속도인데 임진왜란 전에는 고작 종6품 현감에 불과했으나 1년 만에 종2품 충청 병마 절도사까지 승진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대위에서 1년 만에 중장까지 승진한 셈이라고 합니다.

사후 추증된 우찬성은 종1품. 인맥 덕분이 아니라 정당하게 공을 세워 승진한 것을 사료상의 기록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습니다.너무 일찍 죽어서인지 활약상에 비하면 안타깝게도 인지도가 바닥입니다.

 

인품도 훌륭하여 종2품 병마절도사의 높은 벼슬에 있었으면서도,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보수할 때 함께 병사들과 함께 웃통을 벗고 공사에 참여할 정도로 솔선수범하는 성격이었습니다. 좀 더 선양되기를 기원합니다.

▷신계리 마애여래좌상: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산19

 

풍악산 중턱에 있습니다.포장도로와 비포장 도로가 혼재되어 있어서 조심히 운전해야합니다.임도에서 50m 정도 들어가면 멀리 2단으로 된 석축이 보이고 잘 생긴 불상이 보입니다.

촛불이 켜져있고 청소도구와 소화기도 보입니다.

3M가 넘는 이 불상은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만 누가 만든지 알수 없습니다. 

옆에서 보니 상당히 입체감이 돋보입니다.바위모양 자체를 광배로 삼고 고부조 돋을새김이 압권입니다.코의 왼쪽 귓불 일부가 부서져 있지만 보존상태는 상당히 좋습니다.바위에서 빛이 나는지 사진을 찍으니 주위는 상대적으로 더 검게 나옵니다.

▷혼불문학관: 전북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

 

남원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지역의 사람들은 모두 용의 현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혼불의 최명희작가님은 천추락만세향으로 방비책만 강구하면 바로 교룡이 뿔을 달고 여의주 물고 승천하는 용이 될수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찰랑찰랑 넘치는 방비책으로 만든 저수지가 아마도 청호저수지 같습니다. 노적봉은 낟가리이니 쌀, 즉 경제적으로 풍족함을 의미하고, 벼슬봉의 벼슬은 관작으로 나랏일을 보는 사람의 높은 지위를 의미하는데, 이 두가지를 모두 잡아둘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긴 하겠습니다. 

 


최명희 작가는 "나는 원고를 쓸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는 새기는 것만 같다"고 토로했습니다.

혼불은 장편 대하소설로 1930년대~1943년대를 살아 온 남원의 몰락하는 양반가의 며느리 3대를 다룬 10권으로 된 소설입니다.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 동안 쓴 대하소설입니다.순우리말 단어가 많이 담겨져 있는 작품입니다.최명희 작가는 난소암으로 투병하다가 1998년 돌아가셨습니다.

 

▷구 서도역: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혼불문학관에서 가깝습니다.소설 혼불의 효원이 신행을 다녀와 기차에서 내리던 곳이자 강모가 학교를 다녀 올때 이용하던 공간으로 나옵니다.

 

현실에서는 2002년 전라선 철도 이설로 신 역사를 준공하면서 현재의 모습은 옛 모습을 복원했는데 요즘은 영화 촬영지로 유명합니다.미스터 선샤인,동주,해어화... 등

서도(書道)역의 이름이 최명희의 글쓰기와 오버랩됩니다.

붓글씨를 중국은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은 서도(書道)라고 하고 한국은 서예(書藝)라고 합니다만 서법은 글씨를 쓰는 규칙성을 강조하고 서도는 정신자세,그리고 서예는 예술적 감흥을 중시하는 느낌이 듭니다. 여하튼 서도(
書道)가 역(驛)의 이름이 된 것이 특이합니다.

함안휴게소에서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시청합니다.


2023-10-9

 

남원의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기품이 있고 자기가 사는 고장을 한없이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남원은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지리산의 높이와 깊이만큼 땅이 두텁고 기름져서 사람이 살기 좋고, 백성들은 풍년이니, 흉년을 모르고 살았던 곳’으로서 남원 사람들은 오랫동안 복받은 고장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지역여건상 외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겪어야만 했고 이처럼 오랫동안 외침을 겪으며 자연스럽게 충절의 고장으로 자리 잡은 남원에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선열들의 얼이 황산대첩비, 만인의총, 교룡산성, 충렬사와 같은 유적들로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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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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